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사할린 침공 (문단 편집) == 양측의 전력 == [[소련군]]의 경우, 제2극동전선군 산하 제16군이 북사할린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이 남사할린 침공의 총괄책임을 맡았다. 16군은 예하 56군단(보병사단 1, 보병여단 3, 전차여단 1)과 255 항공사단을 보유했다. 여기에 해군 북태평양 함대 소속 다수의 함선과 [[해군육전대]] 365대대,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기 80여 기가 추가되었다. [[일본군]]으로선 불행히도, 소련군의 공세에 맞설 병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. 거대한 남사할린 전체의 방위는 [[일본 육군]] 88사단이 전담했다. 이들은 [[미국]]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[[결호작전]]의 일환으로서 19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 중 하나였는데 당연히 장비의 질이나 훈련도는 형편없었다.[* 그나마도 2월 28일 제1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들이 가장 정상적이었다. 연초에 그나마 있는 자원을 몰빵해 만든 사단들이기 때문이다. 같은 해 4월 2일의 제2차 병비계획, 5월 23일의 제3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들 상태는 더 안 좋았다.] 추가적으로 가라후토 전역의 민간인 중에 약 1만여 명이 [[예비군]] 징집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, 당시 전황의 급박함을 보면 예비군 동원도 제대로 이뤄졌을지는 의문이다. 해상이나 항공전력의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. 막강한 연합함대는 모두 이미 [[미군]]에 당해서 완전히 수장된 상태였고, 항공전력은 본토를 초토화하는 미군 폭격기들을 막고 있었으며 또한 많은 파일럿들이 [[카미카제]] 공격에 동원되었기에 사할린에 배치될 여건이 없었다. 게다가 대전 말기에는 일본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루트가 끊겨 연료조차 고갈된 상황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